.월새22.4.18 사49:1 의사단일의 거리차이, 하나님과 말씀에 다른 생각을 정리하고 막힌 담을 허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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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새22.4.18 사49:1 의사단일의 거리차이, 하나님과 말씀에 다른 생각을 정리하고 막힌 담을 허물 것

관리1 0 107 2022.04.18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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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8 월새
 
제목 : 의사단일의 거리차이, 하나님과 말씀에 다른 생각을 정리하고 막힌 담을 허물 것
 
찬송 : 88장(주의 주실 화평)
 
본문 : 이사야 49장 1절 -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이스라엘의 중세기 신앙이 침체 되어 사람이 그대로 주저앉고 끝이 날 시점에 이사야는 회개를 외친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된 원인, 출애굽으로부터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를 잊어버리고 돌아서고 세상을 향해 우상을 섬기며 나갔던 이스라엘의 죄를 조목조목 강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섭섭하게 들으면 망하라고 저주를 퍼부은 건데 돌아서지 않으면 망하니 돌아서서 복을 받으라는 부탁이었습니다.
 
1장부터 이스라엘의 죄, 잘못을 있는 힘껏 지적하며 욕을 했고 여기 이사야 49장이 되면 회개하고 돌아서면 복된 날이 있을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이사야가 외치고 이사야가 외친 이 덕분에 회개하고 돌아서므로 이스라엘 왕국의 중간, 중간이 끊어지면 요절이라 그럽니다. 요절, 허리 요 자입니다. 요통. 보통 병원에 가면 디스크 3번 4번 또는 디스크 4번 5번이 고장 났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디스크 4번 그쪽이 바로 허리 요 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젊은 나이에 죽으면 요절을 했다 그럽니다. 중간에 끊겨 버린 겁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왕국에 중간기에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하나님의 나라가 중간에 절단 나고 중간에 꺾여 죽었어야 하는데 이거 죽는다, 죽을병이라 외치는 바람에 돌아서고 다시 끝까지 가게 됩니다. 이사야 다음에 나오는 예레미야 선지자 때는 이제는 망하는 길 밖에 없다고 지적할 때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쳤을 때는 돌아서고 다시 시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너희들 이대로 끝장이 난다고 눈물을 흘리며 전했을 뿐입니다. 이사야는 강하게 외쳤고 예레미야는 울고 끝이 납니다. 예레미야는 초상을 친 선지자고 이사야는 요절할 이스라엘 나라를 수술하여 돌려 세웠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사야는 이스라엘 나라의 중간에 끝날 민족을 다시 새롭게 일으켜 세웠고 예레미야는 초상치고 끝을 내 버렸으니 시대적으로 두 선지자는 하나는 수술해서 살렸고 하나는 초상을 쳐버렸습니다. 이 두 가지가 오늘 신약에는 우리들에게는 겹쳐 함께 옵니다. 항상 우리는 이사야 시대처럼 회개하고 돌아서서 다시 소망의 나를 가질 수도 있고, 또 우리에게는 더 이상 고칠 수가 없어 그대로 끝내야 되는 그런 기회도 있게 되어 집니다.
 
그런 마음, 그런 심정을 모아 49장 1절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몇 가지 접하지는 안 해도 제가 접해 본 바로는 “산들아 원방 백성들아 섬들아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그 말이나 그 말이나 같은데 음악에 가사에 시에 음률을 맞추어 너도 가고 나도 가자, 이렇게 균형을 맞추는 말장난 말놀이 그런 말의 균형 때문에 박자를 맞추느라고 잠언 전도서나 또는 이런 예언을 적고 있다 그러는데 이말 저말 아름다움으로 던지는 말 아닙니다. 결과적으로는 이게 아름답거나 이게 음률, 음률이 맞아 노래를 부르는데 박자가 안 맞아 졌는지는 몰라도 섬이란, 끊어진 곳을 섬이라고 그럽니다. 섬. 섬들아 이어지지 아니하고 끊어져 뚝 떨어진, 자기 홀로, 사람도 보면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 가족 한 십여 명 지금은 한 가족 그냥 몇 명인데 열 명이나 되면 큰 것은 스물이라 결혼 말 나오고, 막내는 이제 젖 먹이고 아이들끼리도 큰 거, 작은 거 차이가 많이 났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큰아들과 막내아들은 열다섯에서 적어도 스물 정도 차이가 나 버리면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섬처럼 끊어져 버립니다.
 
지금은 한 둘 놓는데 가족끼리 뭐 외따로 떨어질게 있고 그럴게 있습니까? 그런데 아이 하나 가지고 부부 둘 사는 셋이 아파트에 살면서 부분 이 방, 아이는 저 방안에 들어가서 문 닫아 버리면 밥 먹을 때나 학교 갈 때나 얼굴 한번 보지 아이 문 닫아 놓고 제 혼자 있는 방에 부모라도 문 잘못 열었다가는 가출하니 뭐니 참 뭐 더럽게 길러서 누구 집이든지 그렇게 길렀으면 그거 더럽게 기른 거지 좋게 기른 거 아닙니다. 우리 아이는 주체성이 있고 우리 아이는 독립성이 있고 우리 아이는 연구 하느라고 뭐 그렇게 위대해 그렇습니까? 부모는 돈이나 주고 필요할 때 불이나 끄고 난 내 멋대로 산다, 부모의 세계와 나의 인생은 다르다, 그런 식인데 이민을 안 가도 한 아파트 안에 한 집안에 벌써 민족이 두 개고 국가가 둘인 만큼 그래 버립니다. 아이의 방이 바로 섬입니다. 섬. 아이가 기준이 되면 부모가 섬나라에 가 버린 거지 연결이 끊어져 버린 그래서 연락이 없고 서로 통하지가 않게 되면 부부도 둘이 각각 다른 섬에 살 수가 있습니다. 평생을 신풍과 서울로 떨어져 살아도 마음은 늘 하나가 되어 보고 싶은데 하나님이 주신 위치와 사명이 달라 보지를 못 해 그렇지 마음이 하나고 걱정이 하나고 그럴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 예배에 생활에 함께 하고 싶으나 부산이나 저 서울에 멀리 사는 분들이 주변에 교회가 한량없이 많아도 우리 신풍교회만 자기 교회인줄 알고 평생을 여기 예배만 예배로 가지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냥 여기저기 방송 켜다가 연결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여기가 까다롭고 다른 곳과 달라 이 식이 맞다는 분들만 그렇습니다. 지금 10년이 아니라 20여년 여기만 새벽까지 예배를 꼬박꼬박 들어오면서도 마음은 늘이 한 가운데 있고 앞자리 있고 늘 여기만 자기의 교회로 자기 품안에 품고 있고 예배당 품 안에 들어와 있는 분들은 사진을 찍어 보면 지도로는 멀리 계시니까 먼 섬에 있는 거 같은데 안에 계시는 분들도 계시고, 뭐 새벽 정도야 그렇지 않겠지마는 주일 예배 정도면 예배당 안에 들어와서도 참 할 수 없이 들어와 앉아 가지고 시계나 보고 그냥 저 놈의 설교 언제나 끝나나, 그러고 속에서 울화통이 터지는 사람들은 아예 섬입니다. 세계가 다른 사람.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원방 백성은 아무리 멀어도 이어져 있는 데입니다. 신풍서 서울은 4백 킬로 떨어져도 이어져 있습니다. 멀어서 그렇지. 그런데 같은 신풍리 안에 삼간도는 우리 신풍리 안에 있는데도 이거는 섬입니다. 이거는 물 빠지면 무릎에 물이 무릎만큼 오면 걸어서라도 간다는데 섬은 섬입니다. 빤히 보여도 끊어진 섬이 있고 아무리 멀어도 이어지면 원방백성입니다. “섬들아” 사상이 독립 돼 있고 신앙이 떨어져있고 생각과 살아가는 사고방식이 전혀 따로인 하나님의 백성들, “원방 백성들아” 이거 다 이방인들인데 이어져있지만은 멀고 멀어 하나님 나라에 상관이 없는 삶,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는 “원방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를 들으라” 존재를 말했고 “귀를 기울이라” 존재 더하기 집중을 하거라, 집중.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태에서 나왔다, 성경에는 모태, 태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출생을 말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출처가 어디냐?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여호와께서 나를 부르셨다” 나라는 존재 자체는 하나님의 목적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이 나, 나 자체를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결혼을 해도 신부라는 사람, 사람과 결혼한 사람이 있고 신부의 이 얼굴, 인물하고 결혼한 사람도 있고 사람과 결혼한 사람은 이게 이십, 사십, 육십, 팔십이 되어도 이어질 것이고 스물의 낯짝, 얼굴하고 결혼한 사람은 한 십년 되면 얼굴이 바뀌면 이거 하고 얼굴, 사진하고 결혼했으니 사진이 바뀌면 이제 마음이 바뀌어야 됩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 놨으니 그거 뭐 바꾸지도 못하고 마음은 다른데 가고 그럴 수 있습니다. 돈하고 결혼하고, 대학 졸업장 하고 결혼하고 이런 거 구별 필요합니다. 예전에 부모가 정해 주고 결혼 할 때는 아, 세상에 어디 결혼 제가 합니까? 뭐 하면 하는 거지만은. 인생이 걸린 그 중요한 일을 백 미터 달리기면 앞뒤 볼 것 없이 땡 하면 가 뛰면 백 미터지마는 마라톤은 백리를 뛰어야 되니 평생을 살아가는 일을 결혼도 안 해본 것들이 제가 결정을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런 말을 하면 모두 펄쩍 뛰겠지마는 따져 봐 보지요 그 말이 되는가? 진학 진로 방향 결혼 인생의 먼 길을 보는 것은 부모가 결정하지 그걸 갖다 제가 결정하는 건 그건 섬입니다. 죽을 자리인지 살 자리인지 뛰어 들어가고 보는 것들, 뛰어 들어갔는데 죽지 않았으면 기적이고, 아니면 머리 깨져 죽을 짓이고
 
“섬들아” 앞에 있어도 섬이라는 것은 떨어져 버렸습니다. 너 따로 나 따로 세계가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종자가 다르고, 시골 마당에 닭하고 소하고 풀어놓으면 소하고 닭하고 어울린다고 그게 어울려집니까? 말이 통합니까? 그림으로 보면 그게 한 그림 속에 붙어 있지만은 그거는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전혀 다릅니다. 닭은 소고기를 뭔 산처럼 보고 바위처럼 보고 소는 풀 뜯어 먹으면서 닭이 있으면 그 파리나 모기가 옆에서 귀찮게 하듯이 그래 보지 이게 둘이 어울릴 수 없듯이 부모 자녀가 세상에 십년이 아니라 일, 이십 년을 먹여 놨는데 부모는 부모의 사상과 신앙과 인생이 따로 있고 난 내 인생 내가 결정합니다, 말을 하든지 안 하든지 속에 생각이 그러면 이건 섬나라입니다. “섬들아 나를 들으라” 야 인간아 너는 어떤 존재야? 너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나라와 떨어져 별도의 나라를 만들고 잘 먹고 잘 살 것 같으냐? 하나님이 우주를 만들 때 중심이 지구고 지구의 중심이 구약은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의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이 우주와 영계 전부를 만들고 운영하는 주인인데 “섬들아”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영생으로부터 똑 떨어져 끊어 진 인간입니다. 너는 존재적으로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연결은 돼 있는데 길고, 길고 얼마나 긴지 떨어진 섬이나 멀리 있는 원방 백성들이나 하나님 모르고 구원의 성으로부터 나간 것은 똑같습니다.
 
구약의 이사야서에서는 “섬들아 원방 백성들아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나란 존재고 이름이란 이사야가 해야 되는 사명 역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고 하나님 앞으로 오도록 외치는 말씀들입니다. 구약은 유대인 이스라엘 나라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는 섬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섬은 안 봐도 그냥 다 이방인입니다. 저절로. 육지 쪽은 다윗처럼 나라를 넓혔을 때는 이스라엘 안의 땅인데 또 이스라엘이 줄다 보면 그게 남의 땅도 되고 그렇습니다. 구약은 국경을 따져야 되나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아침에 읽는 것은 나는 내 속에 들어 있는 나의 요소를 예루살렘 성전에 계신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로 다 다스리고 있는가, 교회를 평생 다녀도 신앙밖에 없는 사람처럼 믿고 살아도 자존심을 건드렸다가는 이거는 예배당을 불살라버리지, 절로 가 버리지 그렇다면 그 사람의 자존심은 섬나라입니다. 다른 거는 다 믿어도 욕심만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떼 줄 수 없다, 자기 속의 욕심을 섬 만든 사람, 내 마음의 소원이 신앙이지마는 그 소원이 공부 이십년 해야 되지 직장 잡아 자리 잡으려면 삼십년 걸리지 아이들 다 기르려면 육십년 걸리지 노후에 건강관리 하자면 팔십년 구십년 걸리지 스무 살짜리가 딱 계산해보고 하나님은 한 구십 살에 노인당에서 뵙겠습니다, 그러면 섬이겠습니까? 원방백성이겠습니까?
 
자기가 자기의 목표 달성을 위하여 자기 속에 있는 이런 교회 저런 사상이 떨어져 섬을 만들기도 하고 아니면 뭐 그냥 원방 백성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사야는 하나님 나라가 중심인데 섬나라 멀리 있는 백성들에게 전부 하나님 앞에 돌아오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라고 지금 말씀을 시작하고 계시나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섬나라 일본도 저 태평양의 섬나라의 사람들도 그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또 한국에서 걸어, 걸어, 걸어서 가면 저기 유럽의 끝까지도 갈 수 있고 아프리카 끝까지도 갈 수 있는데 원방 백성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이렇게 읽어 선교를 마음먹는 사람들도 49장 1절을 근거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보다 앞서 나는 내 생애에 나는 내 생각에 나는 내 생활 속에 나는 나의 일정과 내 속에 있는 인격이나 사상 속에 섬을 만들어버린 그런 부분은 없는가? 섬은 아닌데 멀고 멀어 실제로는 섬이나 거기나 똑같은 그런 부분 없는가? 공회복음 좋아 저는 교회만 다닐 겁니다, 그런데 제가 예술을 할 겁니다, 예술 음악을 할 겁니다, 체육을 할 겁니다, 음악과 체육은 전부 다 주일 날 하는 겁니다, 평일 날 돈 벌고 토요일 밤에 일요일날 주말에 운동하고 주말에 공연하고 하는 사람은 그날 하고 다른 사람은 돈 주고 그날 보고 즐기고 주일을 중심으로 이거는 놀고먹는 것이 여행이며 예술입니다. 여기에 대한 소망이 뚜렷하다면 저는 섬나라 갈 겁니다, 성공하면 섬나라 갔을 것이고, 성공을 못 했으면 섬나라 간다고 맨날 수영하고 앉았는 거고.
 
내가 내 속을 봐야 되고 그리고 내가 책임질 내 가족들 중에 누가 섬나라에 혼자 떨어져 한집에 살면서도 사상이 다르고 생각을 달리 살고 있는가? 어떤 부부는 부부가 평생을 살아도 애나 놓지 둘이 사상이 달라 도무지 하나 될 수 없는 부부 있고 천하제일 가까운 부부인데 돈 문제는 정확하게 딱 끊어 버리는 부부도 있고 그렇습니다. 신풍 사택에 돈은 집사람 건강 할 때는 돈 문제는 이게 뭐 이리 가는지 저리 가는지 뭐 별로 가져갈 것도 없는 돈 인데도 돈 만큼은 1원짜리 하나라도 양보가 없습니다. 딱 면도칼로 두부 자르듯이 딱 잘라 버립니다. 돈만큼은. 이게 전부입니다 해도 못 믿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럽니다. 지금 몸이 아픈데도 돈 만큼은 절대 타협이 없습니다. 돈 하고는 저 사람 하고 지금 평생 살고 손주가 열이 넘어도 이거는 다른 나라입니다. 건강했으면 평생을 설득해서라도 경제까지도 한편이 되야 될 건데 이제 말이 안 통하니 뭐 이대로 그냥, 신앙도 교회 위한 충성도 이런 거는 전부 다 한 몸인데 돈? 돈은 두 나라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다르듯이 내 속에 내 생애 내 인격도 들여다보고 이미 머리 굵어진 가족이야 더 이상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거는 이제 마음속에 넣고 기도만 하는 겁니다. 주여 저 첫째를, 저 둘째를, 저 셋째를 저 사람 속에 있는 저 부분을 주님이 열어 돌려 세워 주옵소서 결혼의 첫사랑 때는 얼마든지 서로 바꿔 나갈 수 있습니다. 또 아이들이 어려서 자라갈 때는 얼마든지 구워삶든지 빌든지 설득을 하든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 안에 있도록 해야 됩니다.
 
이게 섬이 되어 독립을 해 버리면 독립국이 됐으니까 출세한 게 아니라 끊어지면 섬이 되면 어떤 거냐? 자기 손가락 하나 끊어 봐 보십시오. 어찌 되는가? 손가락 끊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뭐 아직도 주머니에 있는데? 그렇습니까? 이건 붙어 있는 것과 끊어 놓는 것은 아예 다릅니다. 그게 섬입니다. 이 눈이 두 개니까 하나 정도 한번 빼서 구슬치기 해 보시겠습니까? 그걸 섬이라고 그럽니다. “원방 백성들아” 중풍이 와 가지고 오른쪽 발끝에 감각이 없으면 그게 바로 원방백성입니다. 연결은 되어 있는데 이거는 제 멋대로 따로 놉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으로 소원으로 순간순간 동행해야 되는 말씀으로 이사야 49장 20절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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