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새22.4.20 사49:6 미리 준비한 예정, 45:22의 이방의 앙망으로 제자리로 돌려 세울 제한을 없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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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새22.4.20 사49:6 미리 준비한 예정, 45:22의 이방의 앙망으로 제자리로 돌려 세울 제한을 없앰

관리1 0 103 2022.04.20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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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0 수새
 
제목 : 미리 준비한 예정, 45:22의 이방의 앙망으로 제자리로 돌려 세울 제한을 없앰
 
찬송 : 151장 (주님 찾아 오셨네)
 
본문 : 이사야 49장 6절 -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방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도록 불러들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상적일 때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아야 됩니다.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지만 성전은 제사장 지파만, 제사장 가족만 출입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 예루살렘은 필요한 인원만 있고 그렇지 않으면 원래 베냐민 지파의 땅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면 더 좋은 데가 있고 더 험한 데가 있지만 그것까지 다 감안하고, 열두 지파에게 각각 사명으로 위치를 다 나누어 맡겼습니다. 발이 나도 손 되고 싶다, 생각부터 바꾸는 게 좋습니다. 발은 발일 때에 보배가 되는 겁니다. 발이 발 되면 눈이, 눈이 된 것과 같습니다. 발이 눈 되고 싶으나 될 수가 없으니 그냥 이 자리를 지킨다, 그거 가지고는 어느 순간 미혹하면 그만 불만 되며 어디까지 갈지 모릅니다. 발에게 눈이 어떠냐? 전연히 자기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자부심 그 감사가 다르지를 아니해야 이게 든든합니다. 억울한데 참는다, 그건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한번 터지면 댐처럼 크게 터집니다. 근본이 바뀌어야 해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 안에 살아야 되는데 하나님의 나라 안에도 지파별로 가족 별로 정해준 곳이 있어서 아합 왕 때 나봇이라는 사람은 무자비한 왕이 그 포도원 보기 좋으니까 나한테 넘겨라 돈 줄게 팔아라 했는데 어떤 돈을 줘도 하나님이 우리 지파 우리 가족 우리 조상에게 맡겨 놓은 사명이니 분깃이니 왕이 달라 해도 줄 수가 없나이다, 왕이 돈까지 준다 하고 아합에게는 걸렸다 하면 뒤에 이세벨이 온갖 짓을 다하는데 죽어도 줄 수 없습니다, 이건 이스라엘 밖에 포로 되어 간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밖에 포로 되어간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 안에서도 자기 위치 자기 사명이 흔들어진 사람 다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구약은 육체의 이스라엘이니까 하나님 나라 안에서 움직인 것은 사연을 조사해봐야 알고, 무조건 그렇지는 않으니까. 이스라엘 밖에 움직인 것은 포로든지 망명이든지 피난이든지 그건 이스라엘 안으로 데리고 와야 됩니다.
 
이사야 때가 되면 이스라엘 왕국이 몇 백 년 지나면서 별별 사연으로 살기 위해 나간 사람, 잡혀간 사람 복잡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사야선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불러들이시는 겁니다. 어디에 가 있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장소로 와서 자기 사명 감당하거라, 망한 나라, 망하기 직전의 이 나라가 과연 그게 가능하겠느냐? 포로 잡으러 오는 것도 어려운데, 힘이 없어 빼앗긴 그들을 되찾아 오겠느냐? 또 나오미 가족처럼 유다 지파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에브라다. 살아야 될 줄 알면서도 배가 고파 모압으로 갔다가 남편 죽고 아들 둘 죽고 여자 셋만 남았는데 그 여자 셋 중에 며느리 둘은 이방인입니다. 오고 싶어도 못 옵니다. 올 수 없는 며느리들이고. 그런 지경에 또 살 수가 없어 죽을 각오를 하고 오면 오지 제 발로 나간 사람 돌아오기 어렵고 잡혀간 사람 돌아오기 더 어렵고 이래 어렵고 저래 어렵고. 신앙생활 총총 하다보면 언제 도시 구경하랴? 관광가고 싶어 마음이 떠서 나간 사람, 마음이 떠서 간 사람이 시골로 다시 돌아오고 교회로 다시 돌아 올 리가 있습니까? 세상 구경하고 나면 얼마나 좋은데, 세상 구경을 하다가 싫증이 나도 몸에 익어져버리면 돌아오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또 세상이 먹고 살기 어렵다, 신앙생활 다 해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살래? 이렇게 쥐 박아가지고 끌려 세상을 나간 사람은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교회로 신앙으로 다시 출발하는 걸 놔둡니까?
 
출애굽에 바로왕이 출애굽을 못하도록 가로막을 때 애굽을 가장 잘 알고 실력이 가장 출중한 모세가 봐도 그건 불가능했는데 하나님이 직접 하면 직접 될까 하나님 아니고는 안 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도 천하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제자리, 다시 자기 신앙의 사명에 돌려 세운다면 출애굽과 같은 기적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 오듯이.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기적이고. 그런데 오히려 이것은 쉽다 할 만한 그다음 일이 있으니, 이방인들이 이런 모습을 보며 이사야의 예언과 활동과 데리고 오는 걸 보며, 이방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빼오는 것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그들을 붙들고 있는 이방인들도. 누가복음 15장 먼 나라로 가버린 둘째 아들이 돌아가는 마당에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또 돌아가 집에 환영 받은 이야기를 듣고 그 아들과 어울렸던 먼 나라 그들이 함께 어울렸던 그는 가출했고 아버지의 자녀이니까 들어갔고 그리고 환영을 받았다만 우리야 다른 나라고 우리야 남의 식구니 상관이 없지 않겠는가? 이리 돼야 되는데 그 이야기를 다 아는 그 나라에 함께 있던 이들이 그런 아버지며 그런 세계며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에게도 전적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을까? 그건 은혜지 그건 인간으로서 계산해서는 받아드릴 수 없는 건데 은혜라면 우리에게도 그런 은혜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만약에 그들이 문을 두드리고 아버지가 받아주게 된다면 내 자식이니 가서 사고 쳤다가 오는 거야 받아주지만은 어울렸던 주변의 그 인간들까지 밉상인데 그걸 갖다가 받아들이다니 그럴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들까지 받아 줬다면 이거는 더욱 큰일이라.
 
그런데 “이방의 빛을 삼아,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몇 장 앞에 45장 22절입니다. 두 장 앞에 45장 2절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땅 끝에 모든 백성들아 나아간 하나님의 자녀들 돌려 세우는 게 아닙니다. 구원에 상관이 없는 땅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앙망하라. 앙망하라. 아버지 재산 다 팔아먹고 다 탕진하고 돼지막까지 갔던 아들이 돌아갔단다, 돌아간 뒤에 어찌 됐는지 뒤에, 뒤에 소문을 들어보니 그렇게 환영을 받았단다, 아버지란 자녀를 다 사랑하지만은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인 것은 그건 부모 자녀라도 그거는 안 될 건데 이건 부모 자녀의 인륜을 넘어서 그건 하늘에 속한 사랑이겠다, 그 이상의 구원의 역사겠다, 그렇다면 나도 그런 사랑의 대상은 혹시 되지 않을까 라고 마음을 먹었다면 이게 앙망입니다.
 
“땅 끝에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이사야 49장 6절에 땅 끝까지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뒤 꼭지를 보며 돌아갔다는 그 소식을 자기 것으로 좀 삼으면 어떻겠느냐? 부러워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부러워하게 된다면 그 부러운 마음은 주님이 주셨고 그 부러운 마음이 바로 구원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그런 징표라,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이방 구원을 명시를 해놨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처럼 또 룻기의 모압 여인 룻처럼, 예외적으로 구약에도 족보로 안 되는 이들이 구원 받은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도 급할 때에는 둘러가고 예외가 있느냐 그거야 성경  잘못 읽어서 그렇습니다. 에덴동산 안에서 선악과 먹고 쫓겨 날 때 동쪽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동쪽을 막아버렸습니다. 선악과 때문에 쫓겨났고 선악과에 자기중심의 악이 있어 들어오지 못하게 막힌 것이니, 이게 대속으로 풀리면 풀리는 자리입니다. 가인은 범죄를 해 놓고 죄 지었다는 사실도 아니라고 거짓말하고 회개도 버텼습니다. 하나님이 막아놓은 하나님의 나라, 막혀놓은 동쪽 그 밖으로 간 것이 가인입니다. 모압은 민족적으로 출발부터 그런 출발의 민족입니다. 롯의 걸어갔던 소돔의 길에서 터쳐 나온 결과였는데 그 결과가 낳은 원인을 해결하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이미 구원하기로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구원을 얻더라”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주를 그리스도라 할 자가 없느니라” “마음의 소원을 먼저 주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라” 이게 다 45장 22절의 말씀입니다. “나를 앙망하라” 앙망이 안 되는 사람은 앙망하고 싶어도 앙망이 되어 지지를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앙망이 되는 사람은 되기로 작정이 돼 있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볼 때는 이방인이라 저건 구원 받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 그래야 율법인데 그 이상 그 넘어 그 이전에 마련해놓은 길을 몰라서 그 소리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급하여 법을 바꾸고 그러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가면서 밀을 비벼 먹을 때 밀의 꼭따리를 따면 추수 행위가 되고, 비비면 정미소의 도정행위가 되고, 입에 털어 넣으면 안식일에는 불 떼지 말고 그 말씀을 다 어기는 거 아니냐? 이렇게까지 율법을 엄하게 지키는 듯 했으나 이 사람들 율법이라는 말도 몰랐습니다.
 
안식일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하나님 중심으로 엿새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놓고 마지막 날을 쉬셨다고 표현한 그 안식일의 주인이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배우는데 모시는데 순종하는데 은혜 받는데 필요하도록 엮어놓은 겁니다. 어리니까 이거 저거 그랬지. 한 살 때 기저귀 찼다고 스무 살이 다시 기저귀를 입을까? 아니면 스무 살짜리가 기저귀를 벗는다고 그게 변심일까? 몇 달 밖에 안 되는 게 기저귀를 벗으면 더 큰일이겠지. 스무 살이 벗는 것은 성장이겠지 그건 파행이 아닙니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오신 주님이 안식일을 만들고 율법을 만든 불변의 하나님인지를 몰랐습니다. 그 분 옆에 있는 것이 안식이고 목적인데, 그 분을 따르고 그 분에게 배우고 그 분께 직접 받아가지는 것이 안식일의 생명인데 이 일을 위해서 이거 저걸 갖다가 늘여놓은 건데, 돌을 가지고 셈을 가르치고, 관심이 없으니까 구슬로 가르치고, 관심이 없으니 사탕을 가지고 더하기 빼기를 가르치다가 돌이고 구슬이고 사탕이고 다 치워 버리고 삼, 삼은 구다, 아니 왜 학습판을 이렇게 엉망을 만드느냐? 비 교육 아니냐? 교육 파괴 아니냐? 1학년 네가 보면 불법이고 교육 파괴겠지, 2학년이 봐도 그렇겠지, 왜 돌로 가지고 구구단을 했냐? 이해가 쉽도록 구구단을 가르치기 위해서 구구단은 구구단을 가르치는 목적에 돌을 갖다 놓은 거지 돌 때문에 갖다 놓은 거 아니다, 왜 구슬로 바뀌었냐? 관심이 없으니 관심을 끌려고, 왜 사탕으로 바꿨냐? 네가 자꾸 마음이 멀어지니까 마음을 붙들어 매려고 그랬지, 이제 왜 다 없앴냐? 셋에 셋을 더 하면 삼, 삼, 구로 빨리 배울 수 있으나 삼천에 삼천을 곱하면 무슨 수로 돌과 구슬과 사탕으로 헤아리겠느냐? 장소가 되겠냐? 일 억에 일 억을 곱하라 했다가는 백년 세월이 다 가지 않겠느냐? 사는데 편리하려고 가르쳐 놨는데 인생 전부를 헤아리다 보면 그거는 주객이 전도가 되고 그거는 반 교육이지 그러면 원칙을 벗어났느냐? 삼, 삼, 구에 동그라미는 그냥 양쪽 숫자를 갖다 놓으면 저절로 된다, 그리고 이치를 깨달으니 아, 돌과 구슬과 사탕이 가고자 했던 원래 목적 핵심이 이것이었구나, 안으로 들어가고 원리를 잡으라는 거지 어떻게 원리를 바꿨냐? 이방인은 구원 하면 아니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고 싶겠지, 원래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 놓으셨던가? 구원은 하나님 하나로부터 아담, 택한 백성 그 택한 백성을 구약에는 이스라엘 울타리 안에 주로 넣어 주셨지 다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이 되며 땅 끝이 되는 이스라엘 나라에서 땅 끝까지 걸어가면 우리 여수가 됩니다. 지도에 거기까진 계산 안 해 보셨죠?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 예수님이 계시던 이스라엘 나라에서 발로 걸어서 마지막까지 오면 여기입니다. 여기. 참 우리 살고 있는 데가 보통은 아닙니다. 땅 끝에서. 성경에 땅 끝을 읽을 때마다 각자 자기도 땅 끝이지마는 지도로 봐도 정확하게 그냥 땅 끝은 여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스라엘 안에만 있고 이것만 구원해야 그 분의 약속이 아닙니까? 그건 네가 그렇게 알았지. 구슬로만 구구단을 해야지 왜 사탕으로 구구단 합니까? 그러는 애 하고 지금 다투는 겁니다. 구슬이 구원이냐? 구슬이 셈이냐? 초기에 셈 할 때 너한테 필요한 때가 있었다, 큰 숫자 헤아리려면 그거 없어야 헤아릴 수 있다.
 
이사야 49장은 이스라엘 안에 있는 구원의 백성들이 알고 보면 흩어져 있는데 그거 모아야 되고 그것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끌어오며 그들과 부딛혔고 그들을 지켜본 이들까지 끌어 왔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전부는 오늘 내 생애, 내 인격, 내 생활, 내 마음 나의 하루해에 나를 구성하는 시간과 생각과 행위와 내 안팎에 있는 나의 모든 것에 다 해당이 되어 집니다. 주일은 주일이니까 주일을 지킨다, 그러면 월요일부터 토요일은? 그건 나의 날이다, 구약에 야곱의 족속 열 두 지파 자손만 구원의 백성이다, 나머지는 전부 지옥 가 버리거라, 어린 너는 그렇게 계산 하겠지, 처음 믿는 사람은 주일만 주일입니다, 나머지는 내 날입니다, 주일을 해석하면 주의 날입니다. 나머지는 다 내 날 아닙니까?
 
신앙이 좀 들고 보면 날 중에 날은 주일이지만은 주일 외의 날도 주의 날인데 그 날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구나, 심장이 안 죽으면 안 죽는다고 팔 다리는 쉽게 잘라 버릴 겁니까? 그거? 뇌만 있으면 뇌사가 아니니 뇌만 멀쩡하면 된다고 눈 두 개, 귀 두개는 막아 버릴 겁니까? 심장, 뇌 자꾸 강조를 하는 거는 이게 전부를 다 움직이고 있으니 이걸 이야기 하는 거고 이거는 고장 나면 대책이 없으니 노래 부르는 거지 심장과 뇌 둘만 멀쩡하면 두 다리, 두 발, 눈, 귀, 입 다 막아도 될 일입니까? 마지막에 백점 만점을 기준으로 보면 심장이나 뇌나 손톱이나 똑같지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전부가 똑 같지. 길러 가고 자라 가는 생명의 역사의 순서와 우리를 유기적으로 자유성이 있게 길러 가시는 하나님의 그 단계 때문에 선순위가 있고 후순위가 있습니다.
 
주일은 주일이고, 평일은 평일인데 평일 속에 내용이 주일처럼 주님 동행, 주의 은혜를 받는 이 면에는 다르지를 않아야 됩니다. 주일은 교회 와서 설교 시간에 배우고 출근하며 길을 보고 출근해서 일을 하며 곡괭이질 하는 그 노동 현장에 땀 한 방울 한 방울 곡괭이를 휘두를 때 마다 성경이 이해가 돼야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져야 되고 설교 시간에 받는 은혜와 출근길에 눈에 들어온 걸 보며 세상 인간을 접하며 깨닫는 것이 다르지를 알아야 됩니다. 한몫에 그리 되기는 어렵지만은 방향 그래 잡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디에 흩어져 있느냐?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나라까지 포로 잡히고 제 발로 간 게 문제가 아니라 난 내 마음 속에 믿음으로 붙들어야 될 나 속에 믿음이 어떡하다가 다 여기 저기 다 흩어 졌느냐? 출근길의 흐트러진 시선도 모아야 되고 퇴근길의 흐트러진 소원 은혜 생활도 붙들어 늘 모으고 다녀야 됩니다. 그리고 나면 그다음 그 주변 것까지 아 여기까지 나의 세계구나, 주님을 머리로 삼은 내가 만물, 영원, 영계 끝까지가 다 전부 다 구원을 중심으로 엮여 지고 나의 안팎만 다르지 다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담고 과제로 풀어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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