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새22.12.9 창25:27 세상 난리 복잡 벗어난 야곱의 종용, 하나님 인도와 복에만 집중한 그 준비

설교 다시보기
동영상이 준비 중이면 '제목'란에 요일만 표시, 타이핑이 첨부되면 점(.) 표시 

.금새22.12.9 창25:27 세상 난리 복잡 벗어난 야곱의 종용, 하나님 인도와 복에만 집중한 그 준비

관리1 0 54 2022.12.09 05:21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221209금새

제목 : 세상 난리 복잡 벗어난 야곱의 종용, 하나님의 인도와 복에만 집중한 그 준비

찬송 : 117장(내 주를 가까이)

본문 : 창세기 25장 27절 -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 고로 장막에 거하니

야곱을 보통 조용한 사람이라 순한 사람으로 보기가 쉬운데 야곱의 평생을 보고 또 야곱에게서 난 아들들을 보면 순해서 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뱃속에서 에서와 다툰 사람입니다. 지지  않으려고 발목이라도 잡고 나온 사람입니다. 뱃속에서부터 투쟁적이고 경쟁적이며 밀려도 밀리지 않는, 밀려도 밀리지 않으려는 이런 면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고 그다음 외가인데 그런데 처음 가는 밧단 아람에 도착할 때 아직 물 먹일 때가 되지 않아 양떼는 모여지고 그곳에 목자들이 있었고 그 다음, 물을 열지 못하겠다는 목자들을 제치고 그 물을 먹이는 그런 일, 여러 가지 상황을 볼 때 야곱도 투쟁적인 사람입니다.

그렇지마는 아이들이 장성하매 점점 자라가며 자기 신앙 자기 결정 자기 앞날을 스스로 개척해야 될 때 이삭은(에서는) 원래 타고난 억센 면으로 사냥꾼이 되고 야곱은 얼마든지 아브라함 이삭으로 내려오는 목축이란 그건 집을 떠나 밖을 도는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목축을 했고 이삭도 목축을 했고 에서도 아브라함도 목축을 했고 이삭도 목축을 했고 그리고 야곱도 밧단아람으로 가자 말자 바로 목축을 하는데 목축을 시작하자 그 외삼촌 라반이 바로 알아봤습니다. 이거 인물이라고. 그리고 외삼촌 라반 집에 가서 20년 목축을 하면서 그냥 외삼촌을 상대로 서로 주고받는 그런 계산만 날랜 것이 아니라 외삼촌으로부터 양을 맡아 목축으로 떠다니며 그 목적에 대성공을 한 그런 야곱입니다. 사냥꾼으로 들사람으로까지 에서처럼 나갈 정도는 아니지마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어가는 목자, 목축으로서는 밧단아람에 혼자 가도 그 밧단아람의 라반과 그 아들들은 그곳이 텃밭이고 그곳에서 억세고 자리 잡은 사람들입니다.

야곱이 그냥 순한 사람인데 뒤에 환경에 던져지니까 그다음, 발버둥을 치면서 목자가 된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장막에 거하며, 지금 이삭이 건강하게 살아있는 때입니다. 그다음, 에서는 밖으로 돕니다. 이 집안의 목축을 야곱이 할 수 있는 때입니다. 뒤에 야곱의 아들들이 목축을 하는 그 범위를 보면 그 범위가 그냥 산 하나, 둘 넘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여러 곳 많은 곳을 다니는 그런 목축입니다.

여러 가지로 봤을 때 야곱이 1대 1로 에서를 이길 정도는 아니지만 일반 목축을 뛰어넘을 여러 가지 면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목축을 해도 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내려오는 목축을 해도 되는 사람이 그냥 장막에 거하니 그냥 집안에 밥이나 하고 살림이나 살며 어머니 모시는 이 정도에서 자기의 진로 자기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서울 가서 살아도 되고 고향에 살아도 되고 서울까지 못 가면 여수 순천이라도 나가면 되고 또 직장 잡으면 잡을 수 있고 제일 뛰어난 사람을 능가하지는 못해도 일반적인 정도 또는 그 이상으로는 살 수 있으나, 살 수 있으나 하나님이 주는 복을 소망하고 그 복을 받으려고 하면, 날 중에 귀한 주일이 기본입니다. 주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6일은 그때는 그때의 예법이 있으나 오늘 우리에게는 주일과 주일 사이 세상을 거치며 수요일 3일 예배를 주일, 주일 예배 사이에 중간에 받혀 놓은 겁니다. 집에 두 기둥이 있는데 가운데 봇장 기둥 하나 더 받쳐 놓으면 더 튼튼하고 좋지 나쁠 것은 없습니다. 다 계산하고 바치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수천 년 신앙의 풍습이 되어 있는 청교도 서구 교회들은 주일 예배 집중만 해도 넘치는데 사회적 분위기가 전부 다 믿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이 나라는 세상 역사 끝까지 복음을 막아 대다가 마지막에 복음을 받은 신앙의 제일 막내이면서도 막은 그 사연이 그렇게 신앙생활과 맞지 않는 생활이었습니다. 불교 유교에 찌들고 또 그런 성향의 사회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자기 본국에서는 수요일 밤 예배도 없는데 이 나라 와가지고는 주일 예배 주일 예배 사이에 수요일 밤 예배를 하나 더 밀어 넣습니다.  주일 예배가 아니지 않느냐? 그 말로 보면 3일 예배는 주일 예배가 아닙니다. 주일 예배와 3일 예배는 별도냐 별개냐 주일 예배로만 드려 나가도 되는 신앙의 사람들도 있고 주일 예배 이후에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6일을 자기 현실 세상 속에 불신 속에 시달리다 보면 또는 그 속을 걸어가다 보면 주일의 은혜만으로 그다음 주일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그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주일 예배의 연장 주일 예배로 넘어가고 주일 예배를 기다리는 가운데 집어넣은 것이 수요일의 3일 예배입니다. 주일 예배 3일 예배, 주일 예배로 그 다음 주일 예배의 은혜가 그 다음 주일까지 가지를 못하고 중간쯤 되면 흔들리더라, 또 은혜가 필요하더라, 그래서 3일 예배로 보충을 해놨는데 3일 예배의 3일과 목요일을 거치며 다음 주일이 채 가기 전에 아쉬워서 금요일 5일 예배를 또 넣는 겁니다.

지금은 이민교회가 많아서 미국의 한국 교회의 새벽 예배가 어느 정도 있을 겁니다. 80년대까지 70년대까지 미국 교회는 새벽예배라는 개념이 아예 없습니다. 밤 예배 개념도 없습니다. 주일 예배만 있는 상태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그램은 평일도 있고 토요일도 있고 그렇습니다. 한국교회 우리는 불신자 전도된 사람이야 주일 예배고 조금 신앙생활을 한다고 그러면 주일 예배 삼일 예배 주일 예배는 기본입니다. 구역 예배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어느 정도 믿는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주일 두 번 수, 금 일주일에 서너 번은 기본입니다. 절 믿는 사람들은 절에 사는 성녀들이나 몇 안 되는 성녀들이나 그렇지 일반 교도들은 1년에 한 번 잘해봐야 한 달에 한 번 번 일이나 있으면 한 번 갑니다. 천주교도 그렇습니다. 천주교 불교의 교인숫자는 그냥 이름에 한 번 올린 숫자입니다.

기독교의 숫자는 한 번이냐 두 번이냐 세 번이냐 네 번이냐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세 번 네 번 다니는 사람들은 천주교나 불교로 가면 그건 간부나 지도자나 아니면 그건 아주 성녀 급입니다. 이게 신앙이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신앙은 잘 움직이냐 잘 못 움직이냐 그 차이지 생동력, 움직이는 게 있어 그렇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지나며 급격하게 예배가 하나씩 둘씩 빠져나가면서 이제는 그냥 넓게 보면 지금 천주교 화로 진행하고 있는 겁니다. 더 가면 나중에 불교처럼 그냥 이름은 천만 명 명부로 올려놓고 천만 성도라 그러는데 일 년에 한 번 가고 일 년에 두세 번 가는 사람도 천만 명은 되지 않습니다. 자기 가족들 이름만 올려놔서 그렇지 지금 급격하게 천주교화를 거쳐 불교화로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에 신앙의 생명력이 식어지다가 어느 정도 식어지면 그 다음 죽어버리면 빈껍데기만 남아버립니다. 주님 오실 때 온 이스라엘이 전부 구약 교인이었는데 살아있는 사람은 한 다섯 종류 예수님의 부모 하나, 세례 요한의 부모 하나, 동방에서 온 박사 생각도 못한 사람 하나, 들에 양떼를 맡아 그날 밤도 흑암의 세상을 깨어 지키던 목자, 그리고 시므온과 안나 처럼 성전 생활을 이어가던 그런 한 두 사람, 이거 뭐 몇 명 외에는 나머지는 전부 그냥 다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백성이나 말만 다르고 또 택함이야 하나님만 아니까 모르지만 일반적으로는 전부 다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처음 오던 초림이 결국은 그리 됐단 말은 주님이 오시는 재림도 또 그렇게 되리라 인자가 올 때 노아 홍수 때처럼 또는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처럼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믿는 자를 보겠느냐 노아 때도 불과 여덟 명이라 이렇게 숫자까지 한 번 더 짚어놨습니다. 오늘도 여덟 명이라 그 말은 아니지만 극히 적을 것이라 여기까지는 우리가 살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진로를 에서에게는 밀리지만은 에서를 이기지는 못하지만은 밧단아람에 갔을 때 그곳에 텃세 잡은 목자들을 이겨버리는 것이나 외삼촌 눈에 목자 노릇 시작하는데 보니까 마음에 쏙 들어 붙들고 싶은 것이나 실제 20년 그 목동 목축하며 처음부터 바로 그냥 그렇게 실력이 있었던 걸 봐서 그리고 위로 내려오는 아브라함 이삭을 봐서도 얼마든지 목축만은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야곱이었는데 “장막에 거하니 종용한 사람이라” 야곱이 종용한 사람이 아니라 뱃속에서부터 싸운 투사입니다. 좁은 배 속에서 형은 억세니까 뭐 그냥 싸울 것도 없이 이깁니다. 그걸 이기려는 야곱의 투쟁은 볼 수가 있는 겁니다. 투쟁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숨소리 죽이고 조용하게 그냥 장막 안에 있었을까, “복중에서부터 두 민족이 나누이리라 에서가 야곱보다 강할 것이라, 클 것이라 그러나 야곱을 섬기게 되리라“ 이 예언 때문에 리브가는 뱃속에서부터 기대하고 기도했을 것이고 태어날 때부터 야곱에게는 아브라함 이삭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역사 이게 더 구체화된 것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름일 뿐이나 하나님의 백성에는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 역사를 쭉 이어보면 하나님의 능력이었고 그 능력을 다시 보니까 하나님이 주신 복이었고 세상이 보면 보이지 아니하고 믿는 사람이 보면 멀리 보이나 눈 밝은 사람이 보면 먼 것이 아니라 이미 들어와 있는 겁니다. 모두가 알 때는 이미 늦었고 지나가 버립니다. 미리 봐야 복음이지.

오신 주님을 목자와 예수님의 부모 요한의 부모 시므온과 안나 또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로 오신 분을 미리 알아버렸습니다. 아기 때 나의 구주로 붙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 못 박히면 구원의 완성이 되는데 환호하고 박수치고 아니면 멀리서 저게 뭔가, 이게 거의 전부였습니다. 오신 주님 구원의 완성에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일반인입니다. 아는 사람은 아기로 올 때 아기를 붙들고 이미 나의 구주 구원의 주님으로 모셔버렸습니다. 그 예수님이 언제부터 구주입니까? 구약 때부터 이미 구주입니다.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힌 그 가죽옷부터 벌써 볼 수 없는 2위 성자는 구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사람 눈에 띌 때는 벌써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게 아브라함 이삭으로 내려오는 장자의 명분입니다.

에서의 눈에는 이게 돈 되지 않으나 리브가의 눈에는 이 집안의 아브라함 이삭의 복입니다. 그 리브가가 여기에 대해서 눈이 밝은 이유가 리브가의 부모나 그 윗대나 이삭의 윗대나 데라 라는 할아버지 밑에 아브라함과 그 다음 브두엘의 아버지가 나홀 이지요. 데라 밑에 나홀 아브라함 내려오면서 그다음 브두엘 이삭으로 내려오면서 이렇게 내려옵니다. 족보로 보면 노아로부터 내려오는 할아버지 아버지 손주로 내려오는 관계나 동선으로 보면 이주의 흐름으로 보면 갈대야 우르에서 출발한 데라가 온 가족을 끌고 오다가 가나안 들어오기 전에 중간에 앉은 곳이 밧단 아람입니다.

리브가는 모르고 태어났고 알고 보니 삼촌이 되는 아브라함은 그대로 주님을 따라 끝까지 가서 아브라함 이삭이 되었고 리브가 자기 쪽은 한 걸음 더 나가야 되는데 중간에서 그만 앉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사환이 왔고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면서 한 걸음 더 일찍 걸어간 아브라함 그곳에서 난 이삭을 따라 리브가는 비록 한 걸음 늦었지만 뒤에 따라 붙였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데는 불편이 없고 그곳은 그곳이고 이곳은 이곳이나 노아의 직계 후손들입니다. 노아, 셈으로 똑 내려오다가 데라까지 그대로 내려오다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중간에 선 데라와 나홀, 다른 식구들 여기서 그대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인도에 가나안까지 들어가 버린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위하여 좀 쳐져 있던 한 걸음 앞에 앉아 있던 이 리브가 집에 사환이 가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밧단 아람을 거쳐 가나안까지 들어가 버린 신앙에 제일 앞선 아브라함 쪽에서 한 사람을 구합니다. 리브가가 이 아가씨가 그냥 소식 듣자 바로 출발했습니다. 오빠 라반이 아버지 브두엘과 함께 어느 날 저녁에 갑자기 와가지고 통고가 왔으니 며칠이라도 좀 섭섭하니까 인사를 하고 잔치를 하고 환송회를 하고, 라고 할 때 사환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순간순간 따라가는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의 신앙을 받은 사환은 받은 사명이 있어 확정이면 출발이고 아니면 안 된다 할 때 리브가 본인에게 물어보자 리브가 바로 보따리 싸고 따라 붙여버립니다.

얼른 보면 시집 못 가 환장한 아가씨가 혼인 얘기 들어오니까 정신없이 뛰쳐나간 것 같은데 또는 부잣집에 예물을 보고 부자인가해서 얼른 나간 것 같은데 신앙적으로 보면 갈대아 우리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더듬으며 오다가 자기 아버지는 중단했고 할아버지도 중단했고 아브라함만 한 걸음 더 나아간 그 아브라함이 다시 와서 부르는 소리를 듣자 형제와 부모와 할아버지가 따라가지 못한 그 신앙의 걸음에 얼른 따라 붙여버렸습니다. 한 걸음 늦었지만 리브가가 따라붙었고 리브가가 따라 붙인 그 신앙이 야곱으로 내려옵니다. 그 리브가기 때문에 복중의 아이들 때문에 기도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고 벌써 늦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인도를 받았고 그다음부터는 야곱을 신앙으로 지켜보는 겁니다. 목축으로 얼마든지 밖을 돌 수 있으나 오늘의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것을 제쳐놓고 우선은 에서에게 갔으나 이게 야곱으로 오는 것이 맞고 야곱으로 오는 그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다음, 늘 신앙에 유리한 하나님의 주시는 그 기회를 받는데 어느 것이 더 좋은가 리브가가 여기에 집중했고 야곱은 순종했고 이게 조용하게 기다린 야곱의 생애였습니다.

이거 뭐 이 정도 준비를 하면 마태복음 25장 대낮에 기름 준비하는 사람들 그 낮에 기름 준비야 마음먹으면 되는 것이고 어두운 밤중에 주님 오실 때 불 키는 것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불가능하나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그건 뭐 그냥 간단한 것처럼 조용히 기다린 야곱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인도에 복이 전부 다 여기에 집중한 그 준비 그 인내에 팥죽의 사건이 있었고 그다음에 축복의 사건이 있었고 밧단 아람으로 갔고 별별 고생과 여건은 야곱에 믿음 없어 야곱을 고치는 치료 과정이지만 태어나 모든 세상의 가능성 모든 세상에 자기도 그 시류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시대와 주변과 자기 여건 전부를 조용히 묻어버리고 접어버리고 하나님의 인도와 주시는 계획은 제가 뱃속에서 받은 겁니다. 에서로 내려갈 하나님의 복의 장자의 명분이 야곱으로 가게 돼 있다, 그때가 언제인가 그 날까지 조용하게 입 닥치고 그냥 어머니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세상을 바쁘게 따라가야 되는 별별 일정 다 제쳐놓고 남들이 보면 공부에 관심도 없는 것 같고 이 바쁜 경쟁 사회에 이렇게 갖추고 저렇게 갖춰야 되는데 저것들은 뭔 저런가, 할 만큼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보면 하나님 주시는 기회를 잡기 위해 정신 바짝 차리고 온 신경 집중하여 바쁩니다. 겉은 조용하나.

오늘 우리의 자녀에 대한 어머니적인 지도의 자세가 그리 돼야 되고 그리 될 때 이 아이가 어머니 품속에서 보호를 받고 그 방향으로 자라는 겁니다. 아이가 복잡하다는 말은 아이를 품은 엄마가 복잡해 흔들어 놓으니 뭐 아이가 그게 복잡해지지 안 복잡해지겠습니까? 들볶아 대는데 인간 속에는 별의별게 다 들었는데 이 속에서 선을 잡아내고 이 속에서 의를 길러도 어려운데 그래도 엄마가 집중하고 가정이 집중하면 되도록 해 주셨으나 엄마라는 사람의 마음이 바쁨이 어지러움이 이 세상 저 세상을 갖다가 마구 거머쥐려고 정신이 없으면 그 뱃속의 아이가 그 품속에 젖 먹고 그 보호를 받는 아이가 소리 없이 이거 다 눈치 채고 그렇게 복잡해집니다.

자꾸 흔들어대면 결국은 세상에 피동 되고 요동되고 뿌리가 뽑히게 돼 있습니다. 어린 것 연한 걸 어머니가 앞장서서 품에 안고 복잡한 세상 마구 휘몰아쳐도 우리는 장막, 장막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입니다.  리는 장막 안에 하나님의 보호 아래 하나님만 믿고 바라보고 주시는 기회를 지켜보자, 준비하자, 받을 준비 그릇 준비되었다가 뭐 주시니 쉽게 그냥 받은 겁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모두가 세상에 할 일이 많고 일정이 바빠 정신이 없답니다. 돈 버느라고 정신없고 돈 쓰느라고 정신없고 벌었으니 또 누리느라고 전국과 세계를 뒤지고 난리고 그들이 보면 그들 기준에서는 우리는 고요히.



1차-khs

Comments

Category
State
347,349 since 2005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