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새23.1.21 요10:39 보이신 주님을 처형 요10-13장, 항상 주변 환경 반대, 최종 단독의 길

설교 다시보기
동영상이 준비 중이면 '제목'란에 요일만 표시, 타이핑이 첨부되면 점(.) 표시 

.토새23.1.21 요10:39 보이신 주님을 처형 요10-13장, 항상 주변 환경 반대, 최종 단독의 길

관리1 0 39 2023.01.21 13:45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230121 토새

제목 : 보이신 주님을 처형 요 10-13장, 항상 주변 환경 반대, 최종 단독의 길

찬송 : 61장(이 세상 험하고)

본문 : 요한복음 10장 39절 -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요한복음 1장에서 9장까지를 살폈었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셨는데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나” 오신 하나님을 보고도 그 기적과 능력과 사신 생애를 보고도 믿은 사람이 어느 정도 없었느냐? 열두 제자 중에 하나는 팔았고 열 하나는 배신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보고도 끝까지 따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1장에서 9장까지 수요일 금요일 두 번 살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주님은 양의 우리의 문이다. 양은 주님으로 들어오고 나오며 꼴을 얻는다. 주님 아니고 예수 없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절도며 강도다. 주님이 구원의 문 구원의 주님임을 밝혔으나 아무리 가르쳐 놔도 여기 39절에 보니까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주님이 가르치고 보이고 인도를 하시는데 아예 주님 자체를 잡으려고 이렇게 기회 될 때마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잡고자 할 때 잡혀야 순교일 건데, 왜 주님이 그 손에서 벗어나 버렸는가? 주님은 벗어나시려면 벗어나는 분입니다. 더 가르칠 게 있고 더 보일 게 있어 그러했습니다.

11장, 마리아와 마르다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나사로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여자입니다.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더라” 2절. 그런데 죽게 되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주님이 살렸습니다. 11장 2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그 몸이 생명의 부활로 살아날 것이고, 믿음 이후에 살아생전 신앙생활 한 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심신에 영생이 되어집니다. 죽은 자를 살려놓으니 강퍅했던 유대인들이 죽은 나사로를 확실하게 살린 것을 보고, 믿고 따르는 자가 많아지니까 57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보이면 잡다가 이제는 있는 장소만 알더라도 잡으러 갈 이런 수색 명령까지 떨어져 버렸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으면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되는데 아예 주님을 찾으러 다니는 일까지 생겨버렸습니다.

1장 2장 3장 계속 이어지며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또 가나의 혼인잔치로, 니고데모에게 특별히 가르치시고, 사마리아 사람들까지 전부 다 믿게 되고. 이면 저면 하나씩 둘씩 믿지 않을 수 없도록 전면적으로 순서적으로 낱낱이 기회를 주셨는데, 그 고비 고비 믿는 자는 없고 오히려 잡아들이려는 이런 운동만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2장 “유월절 엿새 전에” 이제 유월절 엿새 전이라는 이 유월절은, 주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날이 유월절인데 한 주간 전까지 지금 세월이 진행이 되었을 때에, 죽기 직전 죽은 나사로의 집에 주님이 들어가셨고. 잔치가 있었는데 3절에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주님이 곧 돌아가실 것이니 주님의 발을 향유로 적시어 향기롭게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가룟 유다가 4절에, 이 향료가 비싼 건데 300 데나리온인데 한 데나리온은 일반적인 노동자 일당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적었습니다. 요즘 일당은 아무리 낮아도 10만 원 안 줄 수는 없는 건데. 그러면 300 데나리온이면 3천만 원짜리 향유를 한꺼번에 부어버렸습니다. 가룟 유다가 이 3천만 원짜리 연보를 하면 많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터인데. 6절에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둑놈이라” 예수님의 돈 궤 회계를 맡았고 “거기에 넣는 돈을 훔쳐 감이러라” 겉은 주님을 따랐고 겉은 가난한 자들을 위했는데 속을 들여다 보니까 도적이 들어앉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문제였습니다.

그다음 넘겨서, 나사로 집에 주님이 갔고 향유를 붓는 일이 있었는데 9절까지. 9절에 보면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계신 줄 알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알면 신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러 왔는데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까지 보려고 모여듭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나사로를 살린 주님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난 나사로까지 다시 죽여 놔야 되니까, 이게 오늘도 믿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심리입니다. 심사가 그렇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그다음 13장입니다. 넘겨서. 이제 12장까지가 주님 생전의 활동이고. 13장이 되면, 성찬을 가지고 잡혀가는 그날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그리고 성찬이 있고 기드론을 건너 겟세마네에 기도하러 가시고 잡혀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그냥 여기까지만 살핍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직접 오셨는데 세례 요한의 증거가 있고 하늘에서 나는 소리가 있고 또 주님이 직접 가르치고 보여준 기적이 있고 능력 있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주님으로 보여줄 것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수만 명을 먹였고 마지막의 결론은 주님 처형입니다. 그 순간에 돌아서지 않은 사람 없고 그 순간에 물러서지 않은 사람 없습니다. 이게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님 오시기 전, 2천년 전 정도 2천 5백년 전 정도 노아 홍수 때도 노아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오실 때도 주님 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 다시 오시는 재림 때도 그러하리라” 나 하나의 생활 나 하나의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바로 믿으려고 작정하고 시작해 보면 나와 신앙을 함께 할 사람은 일반적으로는 없다 그렇게 각오를 해야 됩니다. 만약에 있다면 그것은 횡재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큰 복입니다. 엘리아나 엘리사 같은 시대의 선지자가 이어져 있었을 때. 그렇게까지 이어질 때는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 시대가 아합시대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때. 또 모세와 여호수아를 이어서 지도자를 주신 때가 있었습니다. 엄청난 복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출애굽과 가나안을 맨손으로 들어가야 되는 광야 40년과 가나안 전쟁기였습니다. 환경이 그렇게 어려웠었습니다. 오늘도 위대한 지도자를 주셨다면 출애굽 때처럼 또는 아합 때처럼 극히 어려운 때라는 그런 뜻입니다. 시대적인 지도자를 주지 않았다면 내 힘으로 혼자 걸어가야 되는 어려운 때라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의 길은 혼자 걸어간다는 각오로 가야지 함께 믿는 이들이 많으니 믿을 만하지 않냐? 아예 그런 생각 털고 가야 됩니다. 바른 길 보여주시면 이 길 걸어가는 길 나밖에 없을 것이라 각오는 그래야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렇게 우리처럼 몇 교회라도 함께하는 교회가 있다면 뭐 이거 얼마나 좋은지 꿈인지 생시인지 할 만큼 그런 좋은 때입니다. 백 목사님 가시고 나서 두 사람도 함께 걸어갈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교회가 집회 때 몇 백 명이 함께 모이는 정도는 이거는 일시 주시는 현상이지 내가 죽는 순간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도 죽을 때는 혼자 가야 됩니다. 죽을 때만 혼자 가고 평소에는 그래도 동지가 있고 함께 가는 교회들이 있을 것인가? 큰 일이 생기지 않을 때는 여럿이 함께 가는 일들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은 늘 주님이 일대 일로 혼자 세우십니다. 주변과 환경과 너의 지도자까지 너를 반대해도 끝까지 이길 가겠느냐? 시험이란 항상 혼자입니다. 이 땅 위에 시험도 어떤 시험이라도 혼자 치지, 시험 치는데 옆에 와서 누가 가르쳐주고 힌트 주고 같이 풀고 그러면 그것은 숙제지 시험은 아닐 것입니다. 시험은 쉬우나 어려우나 혼자 치는 것입니다.

명절 끼고 연휴가 이렇게 되어 지금은 제사 문제로 문제 되는 집 거의 없고 연휴를 앞뒤로 줘서 믿는 사람이 주일 전에 온다든지 주일 마치고 간다든지 그럴 수 있지만 그렇지만은 다시 한 번 더 주일에 구정이 겹친 주일을 속을 들여다보면, 주일 중심되고 연휴는 주일을 위해 들러리 세우는 그런 신앙들이 어렵습니다. 어려울 때 주님이 지켜보는 겁니다. 세상 명절과 주일이 겹쳐졌는데 세상 명절이 바쁘고 앞서지 뭔 주일이 있겠냐? 그냥 주일 오전 예배 인사나 하는 거지. 마음은 가족에게 있고 마음은 연휴에 들떠 있고 마음은 연휴에 주일이 들어가 불편한데, 보는 눈이 있어 오고 가고 그러지 마시고.

주일과 예배와 주님 따라가는 나의 신앙에는 주변 천지 뭐가 뒤흔들어도 그거는 그냥 바위 위에 눈이 오면 잠깐 흰 바위가 되지마는 해 돋고 나면 원래 바위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처럼, 이 땅 위에 그 어떤 것이 나와 내 환경을 몰아치고 뒤덮어도 잠깐 덮였다가 녹아지거나 사라지는 먼지처럼 눈처럼 그리 되는 내 속의 내면의 신앙 굳게 가지는 기회 되도록 하십시다.

통성으로 기도하고.

주일과 명절이 겹쳐 놨으니 여기 새벽에 계시는 분들은 맡은 식구 주일이 복되도록 특별히 기도하시고 이렇게 마주쳤을 때는 무리하는 것 아닙니다. 평소는 가장 높고 귀한 걸로 가르치고, 막상 일 생겼을 때는 그 신앙 어린 분들이 준비 못하여 이미 그리 된 것은 이해를 하고 다음을 기다리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1차-LJH

Comments

Category
State
433,372 since 2005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