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새24.4.15 시23:2 말씀 바라보고 의지하고 산 것만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 불신은 오판, 믿음에 전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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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새24.4.15 시23:2 말씀 바라보고 의지하고 산 것만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 불신은 오판, 믿음에 전능

관리1 0 63 04.15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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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5 월새

제목 : 말씀 바라보고 의지하고 산 것만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 불신은 오판, 믿음에 전능

찬송 : 121장(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본문 : 시편 23편 2절 -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에게 풀이란 양식이 되어 집니다. 양식은 양식이나 양을 노리는 일들이 많아 마음 놓고 먹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마태복음 10장 6절 “내가 너희를 보냄이” 주님으로 중생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 사람 주변의 환경은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고양이 사이에 쥐를 보내는 것처럼 이리떼 사이에 양을 갖다 놓듯이 믿는 사람의 세상의 환경은 믿는 사람을 위해서 응원하든지 이해하든지, 협조가 되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사람의 신앙을 흔들어버리고 뺏어버리고, 상처를 주고 삼켜버리는 것이 타락한 세상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자인데 하나님은 전능자신데,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같이 깨끗하고 온전하게 길러 가신다는데, 하나님의 양을 하나님이 책임지고 인도해야 되는 우리의 신앙을 뺑 둘러 보호 가운데 두지 않으시고, 그 말은 천군 천사 둘러싸고 그 안에 우리를 두지 아니하고, 악령과 악성과 악습에 세상과 죄악과 마귀 속에 우리를 놔두시면 이리 가운데 양과 같으니 이게 우리를 위한 것일까? 짧게 보면 당장에 보면 우선 보면, 세상에서의 신앙이란 주변에서 이 신앙에 하나님과 연결을 끊기 위해, 이게 문제입니다. 계란을 닭을, 계란을 그대로 어미닭이 품으면 병아리가 되고 어미닭이 나오고 자꾸 이렇게 번져나갑니다. 그런데 이 계란을 끓는 물에 넣었다 빼면 생긴 모양은 똑같은데, 삶은 계란은 천개 만개라도 이건 병아리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계란 껍데기 속에 흰자위 있고 흰자위 안에 노란 자위 있고 노란 자위에 점 하나가 있는데 그 점이 병아리가 될 생명입니다. 이게 어미닭이 따뜻하게 품어주면 생명의 점이 노란 것을 먹어 영양분을 삼고 그 안에 병아리가 되고 때가 되면 깨고 나오는데 끓는 물에 넣었다 빼버리면 생명이 죽어버립니다. 병아리 되지는 않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믿는 사람 또 교회 또 우리 공회, 또 저처럼 목회자 이속에 하나님과 연결이 이게 생명인데, 교회는 교회인데 세상 속에 교회가 교회의 운영이 교회 속에 하나님과 연결이 살짝 삶겨버리면 그 교회 간판 따라 그 교회 예배당의 모습과 오고가는 교인 때문에 교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결이 이어지면 새 생명으로 앞날에 또다시 같은 생명이 이어 지고 이어지고 이어지며 내려가지만 소돔으로 향하는 롯과 같이 방향을 틀어버리면 하나님은 가나안 쪽으로 가자는데 하나님은 서쪽으로 가자는데 롯은 동쪽으로 방향을 살짝 틀어버렸습니다. 가다가 하나님과 가는 길이 서로 나뉘었습니다. 끊어졌습니다. 속에는 하나님을 떼버리고 겉으로는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넘어왔고, 벧엘에서 애굽에 아브라함과 함께 다녀온 롯입니다. 이 땅 위에는 아브라함의 신앙도 있고 롯의 신앙도 있는 것처럼 보이고, 교회 운영을 하다가 서로 나뉜 것 같고, 교단이 헤어진 것 같고, 이 교단도 그 교단대로 통성도 하고 음식도 하고 철야도 하고 사경회도 하고 구국기도회도 하고 또 이쪽 교단도 똑같이 주일도 있고 뭐도 있고 다 있는 것 같은데, 겉보기는 똑같은 계란인데 끓는 냄비에 들어갔다 온 계란은 소리 없이 안에 익어버렸습니다. 생명이 죽어버렸습니다. 이건 병아리 되지 못하고 이건 어미닭으로 자라질 못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새끼를 놓는 생명의 연속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연결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짐작까지만 하는 겁니다. 저, 저래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일 수는 없을 건데, 저 행동을 보니 저 모습을 보니 그 속의 신앙에 하나님은 없을 텐데 본토 친척 아비 집이 하나님이고 저 사람 속에 하나님은 그거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되어 지면 죽은 신앙입니다. 신앙이 죽으면 죽은 신앙 되면 생명은 이어가지를 못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양에게 풀밭은 밥상입니다. 그 대신에 푸른 풀밭이 있으면 양들이 올 거니 그 이리떼들이 양 먹을 것이 없는 데 가서 양 사냥하겠습니까? 양이 올 수밖에 없는 그 푸른 풀밭에 길목 치고 기다리겠습니까? 양도 신앙의 양식이 있으면 이리가 주변에 있긴 있을 터인데 그 이리가 그냥 배고프게 있지 않을 건데 이래서 풀밭에, 풀밭을 만나면 양은 풀은 반갑지만 노려보는 이리가 어디에 숨어 있을까, 뭐 있다 생각하는 것이 본능인데 그 본능 때문에 불안한 겁니다. 먹기는 먹는데 불안한 것 이게 푸른 풀밭이고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푸른 풀밭 신앙의 양식도 많고, 그 마음이 그 마음속의 자세가 그 마음속에 들어있는 내면이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주께 다 맡겨 놨으니 주님이 목자시니 양보다 강한 이리, 이리보다 더 강한 주님이 지켜보고 계시니 내가 주님의 품 안에 있으니 주의 인도 가운데 있으니 주님의 보호 가운데 있으니, 여기까지 나아가면 그러면 이리 떼야 동물원의 철장 속에 있는 거 구경하지 누가 무서워합니까? 온 가족이 전부 다 저리 생겼구나, 개 같은데 크기는 좀 크구나, 그러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면서 부모 품에 꼭 안깁니다. 모르니까. 아직까지 경험이 없으니까. 그런데 아이라도 한 번 두 번 계속 보면 철장 속에 있는 이리야 철장 안에 있는 사자야 노리개 구경감이지, 그 두려울 것이 없어지는 그 마음이 되어 질 때, 이제 믿는다는 말이 말로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믿는 사람입니다. 튼튼한 철장 안에 있는 이리가 여전히 무서우면 주님은 목자입니다 하는데, 아직까지 목자가 덜 된 겁니다. 정말로 이리인데 주님의 품에 있으니 그게 두려워지지 아니하고, 주님 때문에 주님이 계시니, 주님 때문에 주님이 계시니 주님이 나를 품고 있으니 주님은 이리보다 더 강한 목자시니, 이게 믿어지는 만큼 철장 속의 이리가 관광객들에게 구경거리고 편안하게 사자는 이렇게 생겼구나, 호랑이는 저렇게 생겼구나. 이리는 저렇게 생겼구나, 그림책에 이리 보듯이, 그림 속에 이리야 겁내겠습니까? 그림 속의 이리 보듯이 철장 속의 이리를 보면서 실물을 보니까 아, 더 잘 알겠네? 이만큼이 푸른 초장에 누이신 주님의 품에 안겨 있는 양이라는 뜻이 되어 집니다.

가나안을 만났을 때 가나안에게 쫄아 붙고 가나안에게 두려워지고, 가나안에게 혼비백산하면 믿는 사람으로서는 아직까지 주님을 바라본단 말이 절반이고 조금이지 믿을 만큼 믿지는 않은 사람입니다. 가나안이 들이닥쳐도 내가 말씀으로 산만큼 주님은 내게 목자 됩니다. 내가 말씀으로 걸어간 것이 맞다면 동서로 나뉘며 롯에게 동쪽에 소돔을 맡기고 자기는 서쪽의 가나안으로 헤브론으로 방향을 틀어버렸습니다. 목축업자로서 가기 어려운 험한 곳을 가게 되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는데 마음으로 얼마나 믿었는지 마음으로 100% 믿었으면 소돔이나 가나안이나 동쪽이나 서쪽이나 주님 가자는 대로 가면 동쪽을 만든 주님이, 요단강을 만든 주님이 헤브론 산악 안에도 주님은 위에서 비를 주시든 생수를 지하수로 주시든 주님 알아서 하겠지. 목적 업자에 양떼가 없는 것이 더 낫고 달리 살아가게 하시려면 또 다른 방법도 있겠지? 굶는 경험이 필요하면 굶어 복된 경험을 주실 것이고, 주님도 40일 금식하셨는데 마지막에 부르시려고 부르시는 모습이 굶어죽는 아사라면 주님이 그 방법을 제일 좋게 주셨다면 그것도 주님이 알아서 하셨으니 결정은 주님이 하시고 인도하시면 저는 따르며 든든하게 이리로 돼 있는 환경, 내 신앙을 삼키려는 환경에 맹수 돌진하는 모든 모습에 평안한 마음을 가지겠습니다, 동물원의 맹수 우리 속의 맹수를 편안하게 구경하듯이 그 마음이 얼마나 편안하냐, 그게 자기가 말씀으로 주님을 목자 삼은 정도입니다. 맹수 속에 우리 속에 사자가 정말로 편안하게 구경이 되면 100% 믿은 것이고, 말로는 우리 안에 사자니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는 치는데, 얼굴빛이 바뀐다든지 손이 덜덜덜덜 떨린다면, 그리고 우리 근처로 다가가지 못한다면 절반 믿은 사람입니다. 이게 딱 표시판입니다. 차에 계기판에 연료 양을 보면 기름이 절반 남았구나, 가서 열어보지 않아도 정확합니다. 이제 빨간불이 들어오는데 한 10km, 20km밖에 못 가겠구나. 그런데도 IC 없는 IC가 한 40k 되는 곳에 휴게소 들르지 않고 그대로 통과하는 사람은 계기판 안 믿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계기판을 믿었느냐, 그만큼이 정확하게 믿음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말씀을 바라보고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으로 산 것만큼 주님은 나의 목자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닌 적이 없는데, 내가 주님을 믿지 못해서 불안한 걸 어떡합니까? 내가 못 믿어서 불안한 것을 주님이 믿는 마음으로 바꿔줘도 되는데, 이것까지 다 해주다 보면, 아니 한 살짜리 2살짜리야 떠먹여 주지만 10살짜리 떠먹여주면  사람 되겠습니까? 부잣집의 할아버지의 할 일은 없고 손주는 예쁘니 10살에도 떠먹여 줄 수 있습니다. 떠먹여 주는 만큼 장애자 됩니다. 이게 귀할수록 더 혹독하게 시켜야지 견딜 수 있는 한 혹독하게 시키는 만큼 자랍니다. 12살 때 떠먹이다가 10살도 떠먹이다가 20살도 무릎팍에 앉혀놓고 한 살짜리 돌 되는 아이 보듯이 이러고 앉았으면 그 아이의 남은 인생은 거의 끝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기르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조성하고 당신이 도와주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는 우리에게 맡겨놓고 지켜봅니다. 믿어라, 못 믿겠습니다, 그래도 믿어라, 절반은 믿겠습니다, 네 신앙이 아직 절반인 거다, 성경을 읽으며 믿는 마음으로 너를 바꾸거라, 네 마음이 오판이니 너의 마음을 세뇌를 시켜라, 교육을 시켜라, 다니엘을 보거라, 풍랑 이는 바다에 쫄아 떨던 12 제자를 자꾸 명상하고 자꾸 생각하며 너의 마음에 잘못된 걸 달래거라, 강하게 만들어라, 그리고 너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봐라, 그때그때 그때에 주님이 나를 직접 안아주시고 지켜준 때가 있지 않느냐, 이래서 성경으로 지나온 날을 그리고 말씀으로 이치를 자꾸 따지다 보면 따지는 마음속에 주님이 오셔서 그다음,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노력을 하는데, 우리의 노력을 보시면서 능력으로 바꿔주시고, 능력으로 바뀌고 나면 이제는 이 이리떼가 동물원 우리 속의 이리로 보입니다. 이게 되어졌을 때 순교의 마지막 걸음도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가 있는 겁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정도의 현실이 어렵다 소리 나오면 이건 20살짜리 밥 떠먹여 생긴 일입니다. 환경이 더 좋아져야 안심이 되지 않겠느냐 이미 그런 때가 아닙니다. 연봉 3천에 연봉 5천에 돈 모자란다고 돈 더 벌어야 된다면 이거 30살 40살 밥 떠먹이는 꼴입니다. 연봉 천만 원, 월 백 만 원이라도 우리는 사는 데는 별 불편이 없지 않을까, 경제적으로 이 정도는 되어져야 됩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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